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자성의 난 (문단 편집) === 후반기(1639년~1644년) === 이자성 등 반란군 지도자에게 더할나위 없는 이점은, 명의 근본적인 사회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데다 기근까지 계속되어 재정과 민생이 파탄났고 황실과 조정에 불만이 많은 유민들이 하늘처럼 많다는 것이었다. 투항했거나 도망친 부하들이 다시 이자성 주위로 결집하고 새로운 유민들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이자성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불어났다.[* 1641년 개봉을 공격할 무렵 이자성의 군대는 3만 3천 명이었는데, 1642년 4월에 다시 개봉을 공격할 때에는 무려 113만 명으로 늘어났다. 다만 저 숫자 전부가 전쟁에 참여하여 싸우는 전투원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투원은 전체 인원의 약 10분의 1 가량에 불과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투원을 위해 온갖 잡다한 일들(식량과 옷과 약품들의 보관 및 무기와 장비들의 수리 등)을 해주는 일꾼 역할을 했다고 한다.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07쪽][* 사실 명군도 전투원의 비중은 전체 병력 대비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투는 사령관이 직접 거느린 사병인 가정이 수행했고, 일반병들은 그냥 머릿수 채우는 용도였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조선에게 재조지은을 강조하면서 원병을 내놓으라고 한 것도 당장의 전투병력이 크게 부족해서였는데, 정작 그 조선군 전투병의 주축이 기병강습에 쥐약인 조총병이라는 걸 알면서도 충분한 엄호를 제공하지 못해 써먹지도 못하고 같이 사이좋게 궤멸당하게 된다.] 이자성의 군대는 강력한 기병을 보유했는데, 보병들도 행군할 때에는 대부분 말을 탔다고 한다.[*참조 출처: 전쟁으로 보는 중국사/ 크리스 피어스 지음/ 황보종우 번역/ 수막새/ 258쪽] 또한 북경으로 진군할 때에 이자성 군대의 총 숫자는 50만 명이었는데, 그중 말을 탄 기마병이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참조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08쪽] 그밖에도 이자성의 군대는 하얀 색의 모자와 짙은 남색(파란색)의 외투를 군복으로 착용했다.[*참조 출처: 중국을 말한다 13권/ 마쉐창, 후민 지음/ 이원길 번역/ 신원문화사/ 295쪽] 여기에 이암(李岩), 우금성(牛金星), 송헌책(宋獻策)과 같은 지식인 집단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단순한 농민반란군 수준이었던 이자성군은 본격화된 반군조직이자 명을 대신할 새로운 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들은 석권한 하남성을 중심으로 부정부패한 관료들을 처벌하고 관아의 재물과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토지 재분배를 실시하는 등의 정책으로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 [[장헌충]]과 나여재의 군대도 화남 지방으로 진출한다. 1641년은 명나라에게 있어 실로 치욕스러운 해였다. 2월 장헌충군은 대치하던 양사창군의 포위망을 뚫고 호북성 최대의 요충인 양양을 함락하고 양왕 주익명을 참살하였다.[* 당시 주익명은 양양이 함락될때 도망가려다 장헌충군에게 붙잡혀 참수되었다.] 양왕 주익명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병부상서 양사창은 이후 홧병으로 사망했다.[* 책임감이 너무 과해서 자결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아들이 남긴 기록에서는 자결설을 부정하고 있다.] 직후 나여재는 장헌충과의 불화로 이탈하여 이자성에 합류하지만 결국 이자성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로서 장헌충은 호북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같은 해 이자성과 그의 군사들은 낙양을 함락한 뒤 재물과 식량을 백성들에게 나눠준 후 복왕 [[주상순]]을 [[팽형|삶아 죽인 뒤]] [[식인|잡아먹었다]].[* 다만 주상순은 사치와 탐학질로 낙양 백성들의 증오를 받았던터라 그가 잔혹하게 죽었을때 백성들이 전부 기뻐했다.] 명 황실에 속한 친왕 2명이 반란군에 잡혀 끔살당한 것이다. 그걸로 부족해 양대 반란 세력이 중원 한복판을 차지하며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642년 이자성은 격전 끝에 [[카이펑|개봉]]을 함락시켰고, 1643년에는 좌량옥(左良玉)을 격퇴하고 동관에서 손전정을 전사시키며 1638년 동관 전투 패배를 설욕했으며 상양을 점령하여 양경으로 개칭하고 스스로를 상양왕이라 자칭하였다. 같은 해 무창을 함락한 장헌충도 스스로를 대서왕이라 칭하였으며 이후로 이자성군은 [[순나라]], 장헌충군은 [[서나라]]라는 국호를 쓰며 사실상의 국가체계를 갖추게 된다. 운명의 1644년, 이자성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1644년 초 서안을 함락한 이자성은 서안을 수도로 삼는 [[순나라|대순(大順)]]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칭제하여 황제가 되었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향했다. 이에 맞선 명 왕조에서는 조정 신료들이 남경 천도를 강력히 주장할 정도로 자체적인 방위력이 없는 실정이었는데, 명의 마지막 남은 군사력은 모두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지휘를 받으며 청군과 대치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숭정제는 남경 천도를 거부했는데 이자성군이 북경에 육박한 상황에서 안전한 천도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북경을 포기할 경우 당시 명의 유일하다시피한 군사력인 산해관의 오삼계군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점이 작용했다. 이 시점에서 명 왕조의 살길은 청이 내부문제로 철군하고, 그 틈을 타 오삼계군이 북경으로 돌아와 이자성군을 격파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예 산해관을 버리고 오삼계군과 함께 남경으로 천도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사실상 화북을 넘겨주는 선택이었기에 택하기 힘들었다. 결국 1644년 4월 23일, 외성수비를 맡은 태감 조화순(曹化淳)이 투항했고, 이틀 뒤인 4월 25일 [[자금성]]이 함락되었으며 숭정제는 자결하고 명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